1년 중 가장 많은 눈이 덮여 있는 수백 개의 섬, 바로 홋카이도. 이곳은 일본의 북쪽 끝에 위치한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독특한 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으로, 특히 겨울철에는 하얀 눈으로 덮인 풍경이 마치 동화 속 세상을 연상케 합니다. 홋카이도의 역사와 문화 속으로 들어가 보면, 이곳의 옛 주인인 아이누족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이누족은 먼 옛날, 일본 국가가 처음 세워지기 전부터 일본 열도 전역에 살다가 점차 북쪽으로 밀려난 고대인들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인간'이라는 뜻의 '아이누'라고 부르며, 차가운 설원 속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갔습니다. 아이누족의 생활권은 홋카이도와 그 주변의 쿠릴 열도에 이르며, 그들은 일본인과는 완전히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움푹 패인 눈과 오똑한 코, 입체적인 이목구비를 지닌 아이누족은 온몸에 풍성한 털을 지닌 민족으로, 남자들은 구렛나루와 코 수염을 길게 기르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입술에 조커 같은 문신을 새기는 관습이 있으며, 이 문신은 성인의 상징 또는 미적인 요소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외모와 전통은 아이누족의 정체성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냅니다. 아이누족은 인간과 자연, 동물이 모두 대등한 존재라고 여기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고수했고, 홋카이도 지역에 서식하던 불곰을 숭배하며 그들의 주식으로는 연어를 잡아먹으며 살아갔습니다. 고대 일본에서는 아이누족을 '애조'라고 부르며, 이는 '아이누가 살던 지역은 오랑캐의 땅'이라는 뜻으로, '애조치'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 명칭은 고대부터 이곳이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 아이누의 땅이라는 인식을 보여줍니다. 야마토 정권 시기부터 일본은 아이누족의 땅으로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 최초의 쇼군이 임명되며, '정의랑 오랑캐를 정벌한다'는 뜻의 직책을 부여받게 됩니다. 여기서 '오랑캐'란 바로 아이누족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쇼군은 아이누족을 정벌하기 위해 임시로 임명된 관직이었으며, 이 시기에 일본 역사에 큰 획을 그은 효군의 책에는 아이누를 정복하는 과정이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일본 열도에 미개척 땅과 아이누라는 민족이 남아 있는 한, 일본의 존재 이유도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아이누족은 평화롭게
살던 그들의 땅에 자꾸 침입자들이 들어오는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이들은 아이누족의 전통과 문화를 위협하며, 그들의 생활 방식을 변화시키려 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심화되었고, 아이누족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이를 통해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적 통치와 문화적 압박 속에서 그들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아이누족은 자신들의 땅에서 점점 더 소외되고, 그들의 문화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아이누족의 문화와 전통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들의 역사적 경험은 일본 사회에서 다양한 논의의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1457년, 일본인과 아이누족 간의 갈등이 점화됩니다. 홋카이도 하코다테에서 발생한 아이누족 살인 사건이 그 발단이었습니다. 아이누족의 한 주민인 우소냥이 일본의 대장장이에게 작은 칼을 주문했으나, 그 가격과 품질이 형편없자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이때 화가 난 대장장이가 우소냥 소년을 칼로 찔러 죽이게 됩니다. 순식간에 살인사건으로 변모한 이 사건을 계기로 아이누족의 분노가 폭발하게 됩니다. 아이누족은 조직적으로 단결하여 일본인과의 전투를 벌이는데, 이를 '고 샤마인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아이누족은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 일본인들의 무역 거점 대부분을 기세등등하게 점령합니다. 하지만 1458년, 일본의 무사 다케다에 의해 아이누족의 지도자가 살해되면서 아이누의 저항이 크게 약화됩니다. 아이누족의 야마토를 향한 투쟁은 이후에도 약 100년 동안이나 지속됩니다. 1464년, 일본 열도에서 본격적인 내전이 일어나면서 이들 간의 갈등은 더욱 격화됩니다. 이 시기, 수많은 일본인들이 전투를 피해 홋카이도로 도망쳐 들어오게 되고, 아이누족은 점점 더 많은 터전을 잃게 됩니다. 이후 일본 동북쪽에 있는 사무라이 가문인 흡기 자키 가문이 아이누족의 지배권과 교역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서, 카키 자케 가문은 성을 마스마로 바꾸고 아이누족과의 교역을 독점하게 됩니다. 16세기, 마스마 가문은 아이누족의 교역을 통제하며 일본인들과 아이누족의 거주지를 분리시키고 서로 왕래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합니다. 이로 인해 일본인들과 아이누족은 마스마 가문의 성 성인용품샵아래에서만 교역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주로 쌀과 철 제품을 가지고 오고, 아이누족은 수사물이나 동물 가죽, 해초류 등을 가져와 팔았습니다. 마스마 가문은 교역의 구매 가격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면서 아이누족에 대한 지배를 더욱 강화해 나갔고, 이는 아이누족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이누족은 저항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들은 '샤쿠 샤이니'라는 새로운 저항 세력을 결성하게 됩니다. 이들은 아이누족의 권리를 되찾고, 일본인들과의 불평등한 관계를 끊기 위해 조직적으로 투쟁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누족의 저항은 단순히 물리적인 싸움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땅과 전통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며, 일본에 대한 강한 반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아이누족의 문화와 전통은 지속적으로 위협받게 됩니다. 결국 아이누족의 저항은 일본 정부와의 갈등 속에서 그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669년, 아이누족은 힘을 합쳐 2000명의 군대를 조직하게 됩니다. 잔뜩 열이 오른 아이누족은 일본인 350명을 죽이고, 마스마 번은 에도 막부에 서둘러 지원을 요청합니다. 에도 막부는 3개의 번을 모아 병력을 지원하게 되고, 전투는 일본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납니다. 활을 주로 사용하던 아이누족과 총을 사용하는 일본군의 싸움은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누족의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활을 들고 1년간의 장기전에 돌입합니다. 아이누족은 그동안 생계를 유지하던 방식이 끊기고,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여러모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러다가 막부가 아이누족의 독점 교역권을 없애버릴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스마 번은 체제를 전환하여 아이누족의 지도자인 샤쿠 샤인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서로 휴전을 약속합니다. 그렇게 1670년 무렵, 마스마의 본청에서는 아이누족과 일본인 간의 화합을 약속하는 파티가 열리게 됩니다. 하지만 파티 분위기 속에서 마스마 번의 군인들이 돌변하여 샤쿠 샤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아이누족은 일본인들에게 배신당한 기분에 분노하게 되지만, 리더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면서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샤쿠 샤인 전쟁이 끝난 이후, 아이누족은 야마토인들의 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일본의 세력이 홋카이도의 산업과 교역을 장악하면서 아이누족은 어장에서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게 됩니다. 1789년, 가혹한 노동 조건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아이누족은 다시 들고 일어나게 됩니다. 동쪽의 후나시에서 일본 상인들을 습격하지만, 조직성이 약했던 탓에 금세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마스마 번은 아이누족을 제압하기 위해 10여 명의 지휘관들을 동원합니다. 이제 일본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의 메이지 시대가 열립니다. 1869년, 메이지 정부는 호카이도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키고, 이 땅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호카이도'라고 개칭합니다. 이로써 홋카이도는 일본 국방 개청의 관할 아래 들어가게 되며, 일본 정부는 이 지역의 개발과 산업화를 추진하게 됩니다. 아이누족은 그들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문화를 잃어가며, 일본 사회에서 점점 더 소외된 존재가 됩니다. 홋카이도에는 개척사가 설치되었고, 이 지역에서는 광산 개발이나 철도 부설과 같은 적극적인 개발이 진행되었습니다. 일본 정부의 주도 하에 일본 본토에서 홋카이도로 대규모 일본인 이주가 시작되면서, 아이누족의 독립된 땅이었던 이곳에서 그들의 수난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아이누족을 '구토' 요인이라고 부르며 본토인들과 명확히 구별하였고, 당시의 인류학자들은 아이누족을 인간이 덜 진화한 모습으로 강조하며 그들의 존재를 비하했습니다. 이러한 차별적인 시각은 아이누족의 정체성과 문화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899년에 만들어진 구토인 보호법은 아이누족에게 엄청난 변화와 파격을 가져왔습니다. 이 법안에서 사용된 '보호'라는 단어 속에는 아이누족을 열등하고 미개한 존재로 바라보는 사상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아이누족은 그들의 전통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전통과 습관, 의식들조차 모두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습니다. 대신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해야 했으며, 일본인처럼 살아가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이는 아이누족이 그들의 정체성을 잃고 일본 사회에 동화되도록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또한, 강제 징병과 강제 노동, 일방적인 인체 연구가 시행되었고, 특히 여성들은 일본인의 첩으로 들어가 혼혈 아기를 낳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러한 강압적인 정책은 아이누족의 문화와 가족 구조를 파괴하며 그들에게 심리적인 상처를 안겼습니다. 아이누족의 후손들은 종종 돌을 맞으며 '야만인'이라는 놀림을 당하며 성장하였고, 성인이 되어서는 취직과 결혼에서 심각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차별은 세대를 넘어 지속되었고, 그들의 삶에 깊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1983년 홋카이도 대학교에서 아이누족의 고리 유골이 처음 발견된 이후로 수많은 유골이 추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제국주의가 팽창하던 시기로, 일본은 자국민이 아닌 이 민족을 모두 위계적 인종으로 취급했습니다. 일본인들은 아이누족을 교육시키기 위해 그들을 열등한 민족이라고 하며, 살아 있는 사람들을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전시된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인간 동물원에 갇히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그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였습니다. 1903년 오사카 박람회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짐승처럼 전시되었으며, 이때 전시된 사람들은 아이누족과 조선인들이 포함되었습니다. 일본인 관광객들은 돈을 내고 이곳에 갇힌 사람들을 구경하며 그들의 고통을 즐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시기에 일본이 강조한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다섯 등급으로 나누는 우생학적 사고로, 이는 아이누족과 같은 소수 민족을 더욱더 차별하고 억압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일본의 교과서에서는 홋카이도와 아이누족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다루어졌지만, 여전히 그들의 고난의 역사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습니다. 아이누족의 문화와 전통은 일본 사회에서 점점 잊혀져 가고 있었으며, 그들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이누족은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싸워왔고,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홋카이도 지역에는 아이누족 외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는 표현이 자주 사용됩니다. 이러한 모호한 표현 때문에 일본의 어린 학생들은 아이누족을 인간이 아닌 동물로 오해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는 아이누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교육 현장에서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일본 정부는 오랜 세월 동안 동화 정책을 통해 아이누족의 정체성과 그들의 역사적 행적을 사회에서 지우려 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아이누족이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리게 만들었고, 그들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며, 숨어서 살아가는 세월이 계속되었습니다. 아이누족은 그들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기 위해 애쓰면서도 사회의 주류로부터 고립된 채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아이누족의 후손들이 세상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특히 1994년에는 일본에서 아이누족 최초의 국회의원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는 아이누족의 권리와 정체성을 주장하는 중요한 이정표로 여겨졌습니다. 하얀 오시게 룬 의원은 아이누족의 언어로 사전을 만들었으며, 이는 그 민족의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한, 아이누족을 괴롭혔던 구토인 보호법도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이누족은 그 이후에도 일본 정부로부터 민족으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아이누족이 민족으로 인정받으면 민족 자결권이 생기고 독립에 대한 요구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 정부는 아이누족에 대한 인정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은 최근 돌연 정책 전환을 하며 아이누족의 존재를 인정했습니다. 이는 아이누족에 대한 탄압이 시작된 지 600년 만에 벌어진 뜻밖의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속셈이 있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는 북방 영토 문제에 대한 분쟁이 있었고, 일본은 이 문제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이누족을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2018년,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아이누족을 러시아의 원주민으로 인정한다고 발표하자 일본은 급히 아이누족에 대한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습니다. 일본 정부는 "아이누족은 우리 일본의 원주민"이라고 주장하며, 홋카이도 지역 또한 일본의 고유 영토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아이누족은 큰 괘씸함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아이누족을 탄압해온 동화 정책에 대해 어떤 사과나 반성 없이, 단지 문서에 "아이누족은 일본의 원주민"이라고 표기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아이누족은 그들의 정체성을 무시하는 일본의 정책에 저항해 왔습니다. 그러나 현재 아이누족의 숫자는 고작 1만 3000명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일본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로 남아 있으며, 그들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이누족의 역사와 정체성은 일본 사회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그들의 존재는 일본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현재 아이누족은 자신들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일본 정부와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